열린마당

간호문학 공모전 수상작

여백의 미(美)

우수작 수필
김하니 | 부산 중구 보건소

다소 큰 체구, 눈에 띄게 샛노랗게 염색한 짧은 머리, 작게 반짝거리는 콧볼의 은색 피어싱.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진한 화장과 통통한 볼살이, 누가 봐도 앳되어 보였다. 보건증을 발급받으러 온 학생들이 방을 잘못 찾은 것일까, 보통의 이 공간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외모의 방문자였기에 나조차도 약간의 의아함을 가지고 맞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친구처럼 보이는 검은 생머리의 학생이 노란 머리 학생의 팔짱을 끼고 내 쪽으로 당긴다.
“저기요, 얘가 임신했는데요. 상담하러 왔는데요.”
결혼은 아직, 임신·출산·육아는 더욱 까마득했던 내가 어쩌다 임산부·영유아 건강관리 업무를 맡았다. 1년간 마주하는 예비 엄마의 수는 최소 1,200명 이상. 어느 정도 업무가 익숙해지자, 이제 주로 내소하는 임산부나 난임부부가 국가에서 혹은 지자체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빠짐없이 챙겨주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로 내소하는’ 이들에 한정된 자신감이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되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돼요?”
“열… 열여덟 살이요.”
평일 낮 시간대, 이렇게 강한 인상을 가진 ‘미성년자 임신부’라니. 이 조합만 해도 분명 낯선데, 게다가 뚜렷한 목적을 밝히지 않은 ‘상담’이라는 말은 순식간에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제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병원에서 수술하려면 보건소에서 확인서 받아가라던데요.”
“네? 확인서요? … ….”
이곳에서 수많은 임신 출산 관련 서류를 확인하거나 발급해왔지만, ‘미성년자의 임신 중절을 허가하는 내용의 확인서’는 여태껏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고, 그런 내 모습에 둘은 나보다 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미 1년 전에 집을 나와 부모님과 연락을 끊은 지는 오래되었으며, 학교도 자퇴하여 다니고 있지 않은 상태고, 생리 끊김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21주차가 될 때까지 임신을 의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등본상 주소는 경남 ○○이고, 이곳은 지금 사는 곳(소위 ‘가출팸’이 함께 지내는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보건소라 그냥 왔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난데없는 총체적 상황의 해결점을 ‘주소지 관할 보건소에 가서 문의하라’는 무책임한 답에서 찾고 싶었다.
목소리는 걸걸하고 다소 말투가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분명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린애들 맞구나.’ 여기를 찾아오기까지, 그리고 이 센터 앞에 서서 문 열림 버튼을 누르는 그 짧은 찰나에 얼마나 큰 부담과 주저가 발걸음을 짓눌렀을까? 막막한 아이들이 무슨 해결점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음을 알기에 그냥 모른다고 돌려보내면 계속 마음에 밟힐 것 같았다.
마더세이프에 문의도 해보고, 보건복지부 콜센터에 전화도 해봤지만 모르는 내용이란다. 혹시나 해서 지침서를 다시 뒤져 보고, 전임자분께 연락을 드려 상황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1시간이 넘게 나름대로 백방 알아봤지만 결국, 관련 기관으로부터 얻은 건 ‘어쨌든 여기 연락하더라도 임신을 유지하는 쪽으로 상담만 가능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 손에 쥐어줄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미혼모를 지원하는 시설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였다.
“임신·출산 종합 상담”
나보다 더 무책임한 이 단어가 발단이었다. 2019년 4월, 임신중절을 한 여성과 수술을 집도한 의사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고, 2021년 형법상 낙태죄 처벌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아이들이 말한 ‘상담 사실 확인서’는 이 낙태죄 폐지와 관련된 법을 개정하기 위한 여러 제안 중의 하나였다. 유전적 질환이나 강간 등의 사유가 아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대해 보건소가 전문 상담 기관으로써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취지는, ‘임신·출산 종합 상담’이라는 두루뭉술한 말 뒤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이 ‘전문 상담’을 위한 교육은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한 2021년 이후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나는 이 아이를 대변하는 법적 보호자나 산과 전문 의료진이 아니다. 보건소는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시약이나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뭐라고 이 아이의 삶과 선택에 대해, 임신 중절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타당성을 판단한단 말인가.
그때도, 무분별한 정보가 넘쳐나는 포털과 기사들은 마치 현행 제도인 것처럼 사람들의 눈을 흐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형법과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관련 조항이 개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특히나 부모의 동의를 받기 힘든 상황에 있는 미성년 아이들에겐, 이 공백이 더욱 가혹하다.
‘저출산·고령화’가 화두가 된 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보건복지 분야에서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 많은 정책안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지만, 결국 실현되는 건 5만 원, 10만 원, 조금 늘어나거나 새로 생긴 다양한 명목의 수당들뿐. 오히려, 여러 기관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수당들을 하나하나 시기 맞춰 챙겨 신청하느라 예비 부모들은 더 복잡하다.
신혼부부를 위한 전세 지원, 일과 육아 양립을 위한 육아휴직제도 개선, 양육 부담 경감을 위한 보육료 지원 등. 건강하고 밝은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모두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표면적으로 ‘가장 그럴듯해 보이고 다수의 지지층을 위한’ 제안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청소년을 위한 진짜 성교육의 부재, 모든 현행 제도와 복지가 ‘출산한 여성’에 맞추어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미혼부, 임신과 출산의 모든 부담을 혼자 떠안은 현실 고딩 엄마,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인해 남편 형제의 정자로 인공 수정을 원하는 부부, 아이를 키울 경제적 여력이나 상황이 안되어 임신 중지를 택한 여성들이 수술 정보와 의료기관을 음지에서 찾는 현실, … …. 불과 부산의 한 지자체에 있는 3년간 법의 경계와 밖에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을 나는 직접 겪었고,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내가 아는 선에서 최선의 정보를 드리거나 함께 안타까워하는 것뿐이었다.
최근, ‘36주 낙태 영상’으로 한 유튜버와 수술 집도의가 법의 심판대 위에 섰다. 36주라는 재태 기간이 법적 낙태 허용 기간인가 아닌가, 유산인가 살해인가 하는 것들은 분명 중요한 문제이지만, 처벌의 영역은 사법부에서 철저한 수사를 통해 판단할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나마 4년간 미뤄졌던 임신 중지에 관한 논의가 다시금 쟁점화되어, 여성들과 태아를 한 명이라도 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성 건강과 재생산권 보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출생 극복을 위한 수많은 정책들의 기반까지도 분명 흔들릴 것이다.
의료 공백, 입법 공백과 같은 ‘텅 빈’ 상황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먼저 공격한다. 사회의 수많은 공백들로부터 고통받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내 위치를 지키며 일상의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항상 사회는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기득권과 욕심을 내려놓고, 내일을 의도적인 ‘공백’이 아닌 ‘여백’으로 채우기 위해 치열하게 의미를 찾고 소신을 지킬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